오익민吳益民 공춘호供春壺

2019년 소호搜狐에 한아자사문화전파韓亞紫砂文化傳播의 이름으로 공춘供春과 오이산吳颐山에 관련한 글이 하나 발표되었다. 이 글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论证:紫砂壶鼻祖不是供春而是吴颐山!)

1. 오이산吳颐山은 공춘供春이라 부르는 서동이 없었다.

2. 오이산이 서동을 데리고 공부하러 들어간 절은 금사사金沙寺가 아니라 대조산大潮山의 복원선사福源禪寺이다.

3. 금사사에는 은행나무가 있지만 지금까지 나무옹이가 만들어진 적이 없다.

4. 공춘은 호의 형식이지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5. 자사호의 비조는 공춘이 아니라 오이산이다.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오이산에게는 공춘이라는 서동이 없고 오로지 주창朱昌이라는 서동이 있을 뿐이다. 오이산 집안의 족보인 《오씨가승吳氏家乘》과 《절강통지浙江通志》, 《전당현지錢塘縣志》, 《宜興縣舊志》, 《重刊宜興縣舊志》 등의 기록에는 모두 주창의 기록이 있는데 그를 ‘의로운 노복義僕’으로 적고 있다. 집안 족보 어디에도 공춘의 기록이 없는데 공춘은 허구의 인물이다.

전설 속의 금사사金沙寺는 이싱宜興 후푸湖父 동남쪽에 있는 사찰로 겹겹의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수백 년동안 호환이 끊이지 않아 이를 막기 위해 대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이싱에 있는 죽해竹海의 기원이다. 그런데 오이산이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할 시점인 정덕正德 연간 금사사는 폐사 상태로 사찰이 운영되지 않았다. 다시 가정嘉靖 연간이 되어서야 항회杭淮의 도움으로 절을 중창할 수 있었고 그 당시 문인 왕치등王穉登이 직접 절을 방문하여 주지 원가圓珂를 위해 명문銘文을 쓰고 이를 《형계소荆溪疏》에 기록하였는데 만일 오이산이 절에서 공부하고 공춘이 차호를 만들었다면 《형계소》에 이를 쓰지 않을 리 없다. 이때 오이산은 제학提學의 벼슬을 하며 산서, 복건, 귀주, 하남 일대에 있었고 당연히 금사사 일대에는 없었다.

금사사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청대 가경嘉慶 연간에 벼락을 맞고 고사하였다. 하지만 이 은행나무는 심을 때부터 고사할 때까지 나무옹이가 진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나무가 오래되면 옹이가 지는 것이 아니라 진균이나 해충의 피해로 지는 것이다. 따라서 금사사의 은행나무의 옹이를 보고 이를 형상화해서 공춘이 수영호樹癭壺를 만들었다는 것은 완전히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오이산은 차호를 이용하여 차를 우려마시는 것을 주장하였고 대조산의 복원선사에서 차를 우리는 차호를 설계하고 제작하였다. 그리고 차호에 모두 ‘공춘供春’ 두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여기에서 공은 차호茶壺를, 춘은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다. 산차散茶를 우려마신다는 의미로 ‘공춘’이라 부른 것이지 결코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또한 공춘이라는 두 글자는 그의 친구 심주沈周의 영향이기도 하다. 심주의 시 가운에 <가을날 동관에서 오극학과 헤어지며銅官秋色别吳克學>라는 시가 있는데 여기에서 오극학은 오이산의 자字로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춘이라는 말은 심주의 시 <낙화洛花>에서 한 구절에서 취한 것으로 ‘진정한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차호壺供眞茶’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대에는 이전의 자차煮茶, 점차點茶의 방식과는 다르게 찻잎을 우리는 포차泡茶의 방식이 성행했다. 이는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이전의 차로 인한 폐해를 바로 잡고자 시행한 법이었다. 오이산은 이러한 포차법에 어울리는 차호가 아직 변변치 못한 것을 보고는 자사호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바탕에는 집안 대대로 차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이 전승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조산 복원선사는 오이산의 동생 오길吳佶의 장인인 공부시랑工部侍郎 심휘沈暉의 가산이었고 그 부근에는 산으로 둘어쌓인 금사사와는 다르게 도자기를 굽는 요장과 도공들의 거주지가 있었다. 공부가 이루어진 후 그는 본격적으로 차호를 개발한 듯하다.

정덕 5년(1510) 공춘이라 쓰여진 호는 대조산 복원선사 경내에 보관되었는데 둥근 것은 용단호龍蛋壺, 네모난 것을 인방호印方壺라 불리며 적지 않은 호가 있었는데 점차 승려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글의 논지는 매우 흥미롭다. 이 글의 논리가 성립하려면 오이산의 현손 즉 고손자인 오매정吳梅鼎이 쓴 <양선명호부陽羡茗壺賦>의 아래 구절을 적절하게 설명하여야 한다.

나의 종조부 권석공(오이산)이 남산에서 독서를 하실 때 동자 공춘이라는 동자 하나를 데리고갔다. 공춘이 현지 사람들이 점토로 항아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 점토의 불순물을 빼고 차호를 만들었는데 매우 고아하고 아름다웠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공춘호라고 불렀다.余從祖拳石公讀書南山,携一童子名供春,見土人以泥爲缶,即澄其泥以爲壺,極古秀可愛,世所稱供春壺是也。

이 호는 공춘호 즉 공춘수영호이다. 재질은 본산녹니를 사용하였다. 뚜껑은 영지버섯 두 송이를 올려놓았으며 호의 몸체 모든 곳에 소나무의 껍질처럼 선을 그었다.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차를 우리면 우릴수록 점차 그 문양이 뚜렷해진다.

호 뚜껑 안쪽에는 전서篆書로 된 두 개의 인장을 찍었는데 둥근 인장에는 우吳를 네모 인장에는 이민益民이라 쓰여있다. 호 바닥에는 전서체의“이민제도益民製陶”라고 쓰인 네모난 인장이 찍혀져 있다.

호를 만든 우이민은 50대의 중견 작가로 직칭이나 명리에 신경쓰지 않고 때때로 차호를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공춘호를 비롯한 전통적인 형태의 차호를 두루 잘 만든다.

2020년 천예명호에서 구입하였다. 구입 가격은 60만원이다. 2022년 기준 80만원이 적정 가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