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공逸公 관款 주니호朱泥壺

반수공으로 만든 120cc 정도 크기의 차호이다.

주니朱泥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한동안 질 좋은 주니호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다른 니료로 만든 자사호가 비교적 흔한 반면 제대로 만든 주니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쩌다 그럴 듯한 주니를 발견해도 철홍분鐵紅粉이라 불리는 산화철을 넣어 색을 진하게 하거나 숙니熟泥의 과립을 넣은 이른바 조사調砂 기법을 활용하여 파손율을 크게 줄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성 시 주니의 수축율은 다른 니료에 비해 월등히 높아 파손이 잘 되어 이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주니를 사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니로 만든 자사호를 구입할 때는 온전히 작품만을 보고 작가의 이름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에 나는 꽤 괜찮은 주니호를 몇 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주니호를 사기란 다른 니료로 잘 만든 자사호를 구입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 차호는 좋은 재질의 주니라고 볼 수 없었다. 주니의 밝은 광택과 주니라면 응당 있어야할 주름도 없었고 부분 부분 철성분이 뭉친 것인지 모를 검정색의 잡티가 보였다. 오히려 처음엔 홍니紅泥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쨍한 맛도 없었다. 주니라 하기엔 홍니 같고, 홍니라 하기엔 주니 같은 어정쩡함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차호에 오래 묵은 노차老茶를 넣어 우린, 팽주가 건내준 한 잔의 차에서 나오는 향기와 맛으로 난 단번에 이 차호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다른 차호에 우렸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고 차를 바꾼 후에도 역시 차를 맛나게 뽑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재료를 사용하였고, 전수공도 아닌 반수공이며, 심지어는 작가의 이름도 없고 저관으로 싸구려 고무 도장 느낌의 일공逸公이라는 이름을 찍은 허접한 호. 청대 명가 혜일공惠逸公을 이름을 가탁하기에 한참 모자란 모지리 주니호였는데 말이다.

호를 판매한 수미헌 사장에게 왜 이 호에 차를 우리면 맛있냐고 물으니 대번

“그러게요, 한결같이 차를 참 잘 뽑아주더라구요.” 할 뿐이었다.

이 차호를 통해 좋은 자사紫砂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해 줄곧 생각하였다. 좋은 자사紫砂란 무엇인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차호를 만드는 사람에게 좋은 자사란 가소성이 좋은 재료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쉽게 만들 수 있고 파손율도 적은 재료 말이다. 한편 상인들에게 좋은 자사는 니료가 희소하고 값이 나가는 재료일 것이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 좋은 자사란 차를 잘 우려내주는 니료이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이 차호는 내게 가장 훌륭한 차호이다.

2007년 서교동 수미헌에서 6만원에 구입하였다. 이후 이 재료로 만든 호는 30만원까지 가격을 올려서 판매한 것으로 기억한다. 2022년 기준 30만원 정도면 적정 가격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