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차호는 배梨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혜맹신惠孟臣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니료는 소매요 주니小煤窯朱泥1)로 색상은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이다. 호 바닥에는 전서篆書로 욱재旭齋라고 양각한 각진 인장이 찍혀있다. 출수구는 단공單孔으로 민국시기 차호 제법을 모방하였다. 뚜껑은 절개 뚜껑截蓋이며 대롱 모양의 물대와 고리 모양의 손잡이는 호의 입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왕보근의 인장이 찍혀있으나 그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게다가 입에서 배 부분까지 세로로 긴 줄이 있어 소성 시 수축되면서 생긴 흠결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료의 재질이 매우 뛰어나고, 옛 운치가 있으며, 차를 우려내는 기능 또한 뛰어나, 향이 있는 차를 공부차로 마시기 매우 적합하다.
2006년 연남동 수미헌에서 구입하였다.
왕보근汪寶根(1890-1954)은 호가 욱재旭齋로 민국시기 활동했던 삼보三寶 -이보근李寶珍, 왕보근汪寶根, 진보생陳寶生- 가운데 한 사람이다. 큰아버지인 왕춘영汪春榮에게 배웠는데 자사 7대 예인藝人인 오운근吳雲根, 주가심朱可心과 동문 사형제 사이이다. 백부에게 자사 기예를 배운 후 이싱 오덕성 吳德盛, 상하이 철화헌鐵畵軒 등의 회사에서 기사技師로 일하였다. 1935년 대동파제량호大東坡提梁壺와 삼우병三友甁을 만들어 시카고 만국박람회에서 우수상을 획득하였다.
왕보근은 청말 자사 명인 황옥린黃玉麟과 이웃에 살았는데 늘 그에게 배움을 청해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절기絶技를 배워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신체는 왜소하였으나 늘 힘이 넘쳤는데 자신이 만든 작품이 맘에 들지 않은 경우 모두 깨뜨렸고 매우 아름답고 잘 만든 작품이 아니면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작품을 많이 만들었으나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의 상도합릉호上桃合菱壺는 현재 이싱 도자진열관에소장되어 있고 선운호線雲壺는 홍루몽 연구가인 펑치융馮其庸이 소장하고 있다.
1. 소매요 주니小煤窯朱泥는 석탄과 사암 사이에 끼어있는 니료로 이싱 황룽산黃龍山 기슭 홍묘紅廟 탄광에서 생산되었다. 니료 광맥의 두께가 5cm에서 20cm에 불과하고, 광맥이 판상片으로 존재하지 않고 점點의 형태로 분포되어 있어 채굴 원가와 채굴의 난이도가 높았다.
소매요 주니는 1950년대부터 소량으로 채굴되었으나 그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또한 점성이 강해 단독으로 사용되는 것보다 대체로 자니와 청수니에 섞어 점성을 강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소매요 주니 단독으로 만든 호가 희소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1997년 정부의 자사자원 보호정책으로 주니광산이 폐쇄되었고 이 광산 주위에 나무를 심어 현재는 울창한 숲이 되어 이제는 더욱 더 구하기 힘든 니료가 되었다.
소매요 주니의 소성온도는 비교적 낮아 약 1080도 정도이나 수축률이 30% 정도로 매우 높아 구울 때 뒤틀리거나 변형이 쉽게 되고 심지어는 금이 가고 부서지기 쉽다. 이러한 이유로 대체로 작은 차호에 적합하고 크기가 조금만 커져도 소성 시 터지기 쉬워 이를 만드는 공예사의 수준이 매우 높아야 한다. 소매요 주니의 경우 제대로 된 완성품이 나올 확률은 높아야 60%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원광주니의 가치는 자사 시장에 나온 상품商品 주니와 품질과 색상에서 비교할 수 없다. 진짜 주니 원광은 연한 노란색으로 소성 후에는 오렌지 빛이 감도는 붉은색이다. 또한 조형 변화가 심한 경우 그 부위에는 미세한 주름이 많이 생길 수 있는데 인위적인 조작으로 낸 주니의 주름과는 그 느낌이 자못 다르다. 대충 보면 그 주름이 보이지 않으나 자세히 보면 미세한 주름이 많이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주름지지 않으면 주니가 아니다無皺不朱”라는 말이 생겼다.
2006년 수미헌에서 구입할 당시 25만원이었다. 구하기 어려운 재질인만큼 2022년 기준 300만원에 파는 것도 아깝다고 할 수 있다.